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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0년 사순시기 교황 담화문
작성일 2010년 2월 18일 조회 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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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2010년 사순시기 담화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로마 3,21-22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마다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교회는 복음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솔직히 되돌아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올해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 시작하여 ‘정의’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정의: “마땅히 각자에게 주어야 할 것을 준다”(dare cuique suum)
  무엇보다도, 저는 ‘정의’의 의미에 관하여 숙고해 보고자 합니다. ‘정의’라는 말은 3세기 로마의 법률가 울피아누스의 유명한 표현에 따라 일반적으로 “마땅히 각자에게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고전적 정의에는 각자에게 ‘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이 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법이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더욱 내밀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이는 오로지 은총으로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 재화도 물론 유용하고 필요합니다. 실제로 바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고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먹일 일을 중시하셨고, 사람들의 무관심을 단호히 비난하셨습니다. 이러한 무관심 때문에 오늘날에도 식량과 물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배’ 정의가 인간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듯 하느님이 더욱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의란 마땅히 모든 이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는 덕이다. …… 그러나 인간이 참하느님을 저버리면 인간의 정의는 어디에 있겠는가?”(「신국론」[De Civitate Dei], 19, 21)

  불의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 당시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온다”(마르 7, 15.20-22). 음식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 이외에도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반응에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의 근원을 외적 원인으로 돌리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이념들에는, 불의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정의가 다스리려면 이를 막는 외적 원인들을 제거하면 된다는 전제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이는 순진하고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악의 열매인 불의의 근원은 전적으로 외부에만 있지 않습니다. 불의의 근원은 악에 은밀히 동조하려는 씨앗이 자리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비통하게 인정합니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시편 51[50],7). 사실, 인간은 다른 이들과 친교를 이루는 능력을 훼손시켜 버린 강력한 힘의 영향으로 나약해졌습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유로운 나눔에 열려 있지만 자신 안에 다른 이들보다 위에 서고 그들에게 맞서도록 몰아치는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힘은 바로 원죄의 결과인 이기주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신비한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사랑과 믿음의 논리를 의심과 경쟁의 논리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또한 다른 분을 믿고 기다리는 수용과 기대의 논리는 욕심과 아집의 논리로 바뀌었고(창세 3,1-6 참조) 그 결과 인간은 불안과 불확실성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이 이러한 이기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사랑에 열어젖힐 수 있겠습니까?

  정의와 처다카
  이스라엘 지혜의 중심에는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시편 113[112],7)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정의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의의 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처다카(tsedaqah)는 이를 잘 표현합니다. 실제로, ‘처다카’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 특히 가난한 이, 이방인, 고아, 과부(신명 10,18-19 참조)와 맺는 관계에서의 공정함(탈출 20,12-17 참조)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두 의미는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베풂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 백성의 비참을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명 판을 주신 일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명에 귀 기울이는 일은, 먼저 당신 백성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고자 내려오신”(탈출 3,7.8 참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귀 기울이라고 요청하십니다. 곧 가난한 이(집회 4,4-5.8-9 참조)와 이방인(탈출 22,20 참조)과 종(신명 15,12-18 참조)을 향한 정의를 당부하십니다. 정의를 이루려면, 불의의 근원이 되는 내면 깊이 닫힌 상태인, 혼자여도 충분하다는 환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취하신 ‘탈출’보다 더 심오한 ‘탈출’, 곧 율법만으로는 불가능한 마음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정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의로움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정의를 향한 인간의 갈망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1-25).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이는 무엇보다도 은총에서 비롯되는 정의입니다. 여기에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고쳐 주고 치유하는 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속죄’가 그리스도의 피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은, 인간이 저지른 잘못의 무게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인간의 희생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인간에게 하느님의 ‘복’을 주시기까지(갈라 3,13-14 참조) 한없이 열려 계신 하느님의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이의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죄인을 위하여 죽고 죄인이 의로운 사람이 받아야 할 복을 대신 받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정의란 말인가? 이는 각자가 자기 ‘몫’과 반대되는 것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매우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참으로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의 정의 앞에서 인간은 저항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정의는 인간이 혼자여도 충분한 존재가 아니라 더 충만해지려면 다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돌아서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혼자여도 충분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 곧 다른 이들과 하느님과 그분의 용서와 친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이 자연스럽고 좋은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압니다. ‘내 것’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나에게 ‘그분의 것’을 거저 주시는 다른 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겸손이 요구됩니다. 이는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덕분에 우리는 ‘가장 위대한’ 정의인 사랑의 정의에(로마 13,8-10 참조)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는 모든 경우에서 스스로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전혀 기대할 수도 없었던 그 이상의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서 힘을 얻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이는 모든 이가 인간 존엄에 따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고 사랑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에도 우리는 사순시기의 정점인 파스카 성삼일에 사랑과 은총과 구원이 충만한 하느님의 정의를 경축할 것입니다. 이 참회의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회개하고 모든 정의를 완성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9년 10월 3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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